2000년대 중반, 독일의 소규모 스포츠카 제조사 굼페르트(Gumpert)는 ‘아폴로’라는 이름의 레이싱카 같은 로드카를 선보이며 마니아들 사이에서 컬트적 인기를 끌었다. 아우디 콰트로 WRC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롤란트 굼페르트가 설립한 이 회사는 이후 여러 차례 경영난을 겪다가 2016년 ‘아폴로 오토모빌(Apollo Automobil)’이라는 이름으로 재출범했다. 그리고 지금, 이 부활한 브랜드가 새로운 궁극의 트랙 머신 ‘EVO’를 공개했다.
10년간 10대, 그리고 또 다른 10대
아폴로 오토모빌은 지난 10년간 단 10대의 고객 차량만을 생산했다. 전부 ‘인텐자 에모치오네(Intensa Emozione)’라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의 V12 하이퍼카였다. 이번에 공개된 EVO 역시 생산 대수는 10대로 동일하다. 희소성으로 승부하겠다는 전략은 변함없는 셈이다.
페라리에서 온 800마력 심장
EVO의 핵심은 6.3리터 자연흡기 V12 엔진이다. 출처는 페라리다. F12 베를리네타에 탑재됐던 그 유닛을 기반으로 하며, 인텐자 에모치오네에서는 770마력을 발휘했다. EVO에서는 한층 더 튜닝을 거쳐 최고출력 800마력(약 812PS), 최대토크 765Nm를 뿜어낸다. 전기 모터 따위 없는, 순수 내연기관의 정점이다.
변속기는 6단 시퀀셜로, 공압식 패들 시프트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구동 방식은 후륜구동이다. 하이퍼카 세계에서 사륜구동이 대세가 된 지금, 오히려 이 ‘올드스쿨’ 레이아웃이 운전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고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 아반떼급으로 가벼운 하이퍼카
공차중량은 1,300kg에 불과하다. 이는 국내에서도 판매 중인 현대 아반떼(1,260~1,270kg)와 비슷한 수준이다. 비결은 전면 카본 파이버 보디와 신설계 모노코크 섀시에 있다. 새 모노코크는 무게가 165kg으로, 인텐자 에모치오네 대비 10% 가벼우면서도 강성은 15% 향상됐다.
이 경량 보디와 800마력 엔진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성능은 가히 폭력적이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2.7초, 최고속도는 시속 335km(208mph)에 달한다. 사실 공기역학적으로만 보면 더 빠른 속도도 가능하겠지만, 이 차의 본령은 직선 속도가 아니다.
날개 하나로 1,350kg 다운포스
EVO의 진짜 무기는 공력 장치다. 유압식으로 작동하는 리어 윙은 1초 이내에 전개되며, 다양한 받음각 조절이 가능하다. 이 리어 윙 하나만으로 생성되는 다운포스가 무려 1,350kg이다. 차량 공차중량보다 많은 수치다. 이론적으로는 천장에 붙어 달릴 수 있다는 뜻이지만, 아폴로 측은 그런 주장까지는 하지 않았다.
타이어는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컵 2 트랙 사양이 기본 장착된다. 휠 사이즈는 전륜 20인치, 후륜 21인치의 엇갈린 구성이다. 슬릭 타이어 사용을 위한 별도 휠 디자인도 옵션으로 제공되며, 카본 세라믹 브레이크를 레이싱용 스틸 브레이크로 교체할 수 있는 퍼포먼스 패키지도 준비돼 있다.
트랜스포머가 변신하다 멈춘 듯한 디자인
외관은 한마디로 ‘과잉’이다. 윙렛, 조각된 에어 벤트, 노출된 기계 요소들이 차체 전역에 포진해 있다. 여러 매체들은 이 디자인을 두고 “트랜스포머 영화에 나오는 디셉티콘이 변신하다 멈춘 것 같다”고 묘사했는데, 과장이 아니다.
이 ‘해골화(skeletonised)’ 테마는 실내까지 이어진다. 카본 파이버가 대시보드 전면을 뒤덮고 있으며, 스위치류는 레이싱카에서 볼 법한 토글 방식이다. 스티어링 휠은 요크 타입, 시트는 고정식 버킷 시트에 풀 하네스가 조합된다. 일반 도로 주행용이 아니라는 점을 실내 구성만 봐도 알 수 있다.
44억 원, 그래도 살 수 없다
가격은 300만 유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환율 기준 약 51억 원이다. 여기에 ‘아폴로 포지(Apollo Forge)’라는 인하우스 커스터마이징 프로그램이 적용되어 10대 모두 각기 다른 사양으로 완성된다. 같은 EVO는 두 대도 없다는 뜻이다.
첫 고객 인도는 2026년 상반기로 예정돼 있다. 물론 10대 물량이 아직 남아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차들은 공개 전에 이미 완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