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싱카를 위해 만든 차체에서 거대한 날개와 공기역학 장치를 걷어내면 어떤 모습이 남을까. 부가티(Bugatti)가 트랙 전용 하이퍼카 볼리드의 기술을 바탕으로 완성한 단 한 대뿐인 모델 ‘데스트리에’를 공개했다.
데스트리에는 부가티의 맞춤 제작 사업인 ‘프로그램 솔리테어’가 선보인 세 번째 원오프 모델이다. 브루야르와 F.K.P. 오마주에 이어 고객 한 명을 위해 별도의 차체와 실내를 설계했다.
앞선 두 모델이 특정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에서 출발했다면 데스트리에는 자동차의 비례와 형태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볼리드의 극단적인 차체 구조는 유지하면서도 랩타임을 위해 붙였던 대형 날개와 각종 공력 장치를 줄여 전혀 다른 성격의 차를 만들었다.
볼리드 기반이지만 목적은 정반대

데스트리에는 볼리드의 탄소섬유 모노코크를 그대로 사용한다. 높이는 1m에 불과해 부가티가 지금까지 제작한 자동차 가운데 가장 낮다.
볼리드가 차체 곳곳의 대형 흡기구와 돌출된 공기역학 부품으로 경주차의 성격을 드러냈다면 데스트리에는 매끄러운 면과 낮게 흐르는 실루엣을 강조했다.

바퀴 크기도 달라졌다. 볼리드가 앞뒤 모두 18인치 휠을 장착한 것과 달리 데스트리에는 앞 20인치, 뒤 21인치 휠을 적용했다. 낮은 차체에 큰 휠을 배치해 시각적인 긴장감을 높였다.
차체 가운데를 감싸는 부가티 특유의 C 라인도 새롭게 해석했다. 선은 앞바퀴 바로 앞에서 한 차례 끊겼다가 다시 이어져 기존보다 넓어진 말발굽 모양 그릴과 만난다.
앞부분은 볼리드보다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다. 뒤쪽에는 볼리드의 거대한 고정식 리어윙 대신 차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낮은 날개를 넣었다. 이 구조는 단 한 대만 제작한 시론 프로필레의 디자인을 떠올리게 한다.
운전석은 두 앞바퀴 사이에 낮게 자리 잡았다. 차체는 문 뒤에서 안쪽으로 급격히 좁아졌다가 뒷바퀴 위에서 다시 넓어진다. 양산차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과장된 비례를 실제 차에 그대로 옮긴 셈이다.
중세 기사가 타던 군마에서 이름 가져와

데스트리에는 중세 유럽 기사들이 전투에서 탔던 크고 강한 군마를 뜻한다. 부가티는 낮게 웅크린 차체와 넓은 뒷부분이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한 말의 자세를 연상시킨다고 설명했다.
차 이름은 외관과 실내 세부 장식에도 영향을 줬다. 엔진룸과 실내 곳곳에는 망치로 두드린 듯한 금속 표면을 적용했다. 중세 기사가 착용했던 수제 갑옷을 표현한 장식이다.
부가티 디자인 총괄 프랑크 하일은 데스트리에를 두고 “머리로 이해하는 차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차”라고 설명했다. 볼리드가 만들어낸 극단적인 비례를 공력 성능의 제약에서 풀어내면서 하나의 조형물처럼 표현했다는 의미다.
Type 57에서 가져온 ‘하나의 차체, 두 가지 결과’

데스트리에의 기획은 1930년대 부가티 Type 57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당시 Type 57의 기본 구조에서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자동차들이 탄생했다. Type 57G와 Type 57C ‘탱크’ 경주차는 1937년과 1939년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계열의 차체를 사용한 Type 57SC 애틀랜틱은 지금도 자동차 디자인사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하나의 기술적 기반에서 경주차와 예술품에 가까운 그랜드 투어러가 함께 나온 것이다.
부가티는 볼리드와 데스트리에의 관계를 여기에 빗댔다. 볼리드가 성능과 다운포스를 좇는 경주차라면 데스트리에는 같은 구조에서 아름다운 비례와 수공예 기술을 끌어낸 모델이다.
두 자동차의 관계는 앞유리 위쪽에 마련한 기념 플레이트에도 남겼다. 장인이 레이저로 새긴 플레이트에는 Type 57G 탱크와 Type 57SC 애틀랜틱이 함께 등장한다.
다이아몬드 입자 넣은 전용 파란색

차체에는 고객을 위해 개발한 ‘사파이어 셀레스트’ 색상을 입혔다. 여러 겹으로 칠하는 전용 도료 안에 다이아몬드에서 영감을 받은 미세 입자를 넣어, 빛의 방향에 따라 깊이와 반짝임이 달라진다.
광택을 낸 알루미늄 장식은 짙은 파란색 차체와 대비를 이룬다. 외부로 드러나는 탄소섬유는 앞 스플리터와 뒤 디퓨저로 제한했으며, 이 부분에도 차체 색상과 어울리는 색을 입혔다.
파란색은 부가티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포프 애틀랜틱’으로 알려진 Type 57SC 애틀랜틱 섀시 57591은 처음 출고됐을 당시 파란색 차체를 갖고 있었다. 이후 현재 소유자가 검은색으로 다시 도색했다.
경주차 실내 대신 고급 재단실 선택

실내는 볼리드의 기능 중심 경주차 조종석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꾸몄다.
부가티는 고급 맞춤복을 제작하는 재단실에서 영감을 얻었다. 따뜻한 갈색 계열의 ‘앙브르 보야저’ 가죽과 누벅을 사용하고, 입체적으로 짠 3D 직물로 대시보드와 시트 일부를 덮었다.

3D 직물에는 가느다란 구리실을 함께 짜 넣었다. 구리실은 실내를 원형으로 감싸는 ‘헤일로 라인’ 무늬를 만들며 빛을 받을 때 은은하게 반짝인다. 스포츠 의류에서 사용하는 입체 직조 기술과 고급 맞춤복 제작 방식을 결합한 소재다.
망치로 두드린 듯한 금속 장식은 문손잡이와 송풍구, 스티어링휠 중앙, 도어실에도 적용했다. 실내 한가운데에는 부가티의 프랑스 뿌리를 나타내는 작은 삼색기를 넣었다.
오일 주입구에는 데스트리에 엠블럼과 함께 ‘1/1’ 문구를 새겼다. 같은 사양의 두 번째 차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8.0리터 W16 엔진은 그대로

수제 차체 아래에는 볼리드의 동력계를 그대로 넣었다. 네 개의 터보차저를 단 8.0리터 W16 엔진은 최고출력 1600마력을 발휘한다.
다만 부가티는 데스트리에의 공차중량이나 최고속도, 가속 성능을 별도로 공개하지 않았다. 볼리드가 서킷 주행과 다운포스 확보에 집중한 모델인 만큼, 차체 구조를 바꾼 데스트리에에 볼리드의 모든 성능 수치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도로 주행 가능 여부도 공식 발표에서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볼리드는 일반도로 운행을 전제로 하지 않은 트랙 전용 모델이며, 데스트리에 역시 성능 경쟁보다는 수집 가치와 디자인에 무게를 둔다.
부가티는 데스트리에를 통해 W16 시대의 기술을 또 다른 방식으로 활용했다. 극한의 성능을 위해 개발한 볼리드의 차체를 버리지 않고, 레이싱카와 정반대 성격의 원오프 모델로 다시 만든 것이다.
데스트리에는 8월 열리는 몬터레이 카 위크에서 대중에게 공개된다. 공식 공개 일정의 마지막 무대는 8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페블비치 콩쿠르 델레강스다.